영화감독 태준식과 비평가 허지웅 사이의 논쟁에 대해 영화

영화감독 태준식과 비평가 허지웅 사이의 논쟁을 살펴보았다. 사실 논쟁이랄 것도 없는게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부딪혀 논쟁한 것은 아니고, 허지웅이 언론 지면상에 <두 개의 문> 비평을 썼고, 이에 대해 태준식이 트위터에서 비판, 몇몇 트위터러들과의 대화 속에서 불편한 심기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허지웅이 이에 대해 짧게 언급, 이어서 태준식이 연달아 지난 시절 입바른 비평가들이 자신에게 던졌던 훈계들에 대해 쌓인 불만들을 쏟아내고 있는게 전부다. 그러나 이쯤되면 어떤 식으로든 이런 갈등에 대해 뭐든 이야기해야할 것 같은 욕망을 느낀다.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 개의 문>에 대한 내 입장을 밝히자면, 용산 참사 이후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채, 진실이 밝혀지지 못한채 유가족들이 고통받고 있는,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국가 폭력이 활개를 치는 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 전략으로서의 상영 운동으로서는 지지하며, 영화 자체도 나무랄 것 없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주위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환호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약간은 생경함을 느끼고, 그 작품이 앞으로 독립다큐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는 말들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이 맞는 방향인가? 라는 의문 말이다. 그러나 오늘 낮에 알게된 바에 따르면 내가 이 작품을 카톨릭청년회관에서 본 지난 1월(혹은 2월)의 편집본은 현재 개봉된 완성 버젼과는 다른 것이고, 나는 금주 내에 <두 개의 문>을 친구들과 다시 보려고 한다. 그때가 되어서 <두 개의 문>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점을 밝히고, 여기서는 태준식과 허지웅의 논쟁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우선 나는 어떤 사람들이 대단히 열렬히 찬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준식에 의해 문제시되었던 허지웅의 글 <연민을 걷어낸 용산참사의 진실>(주간경향, 6/26)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206191551251&pt=nv 이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의 앞의 세 문단에 대해서는 일견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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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문>은 근사한 영화다. 그렇다. ‘근사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다큐라는 장르는 묘하게 타자화되어 있다. 요즈음 이 장르가 수행하는 역할이란 일종의 씻김굿에 가까워 보인다. 어떤 소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만듦새에 관한 평가는 유보되고, 관객이든 언론이든 평단이든 그 다큐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시대와 사회에 동참하고 있다고 자족하는 판타지가 존재한다.
이런 식의 소비에는 대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잊지 맙시다” “기억합시다”와 같은 상찬이 뒤따르는데, 결국 냉정하게 따져보면 영화가 아닌 소재 자체에 관한 의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태도가 지속적으로 누적된다면 결과적으로 다큐 장르는 고사할 수밖에 없다. 되레 연성 아이템을 다루는 공중파 TV의 다큐 프로그램이 짜임새나 완성도 면에서 훨씬 빼어난 경우를 자주 보게 돼 씁쓸하다. 다큐의 결기는 소재나 현장의 돌발성이 아닌 영화적 비전으로부터 먼저 제시되어야만 한다. 나는 진영의 논리에 기반해 아군과 적군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화두를 다룰수록, 감독이 활동가가 아닌 집요한 창작자로서의 태도를 고집하며 진영으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는 혜택과 결별해야 한다고 믿는다.#


헌데 태준식 감독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허지웅이 독립다큐를 면밀히 살펴보지도 않아왔으면서 제멋대로 떠들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다큐멘터리에 대해 일군의 알려진 영화 비평가들이 갖는 태도에 대해 쌓여있던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에서 방금 그가 했던 말들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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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노뉴단 활동 할때 많이 들었던 소리가 '이제는 영화를 해야 하지 않겠니?' 근데 그런 소리하는 사람들 대부분 노뉴단 작품 별루 보지도 않았다는 사실. 경직된 운동권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않은체 자신이 본게 전부라고 생각함. 그러면서 가끔 지면글 소재 떨어질 때 엄한 노뉴단및 독립다큐 작품들은 그 씹힘 대상이 되곤 했음. 영화적 비평틀 안에서 얼마나 까기 편한 작품들인가? 아마추어같이 보였겠지. 그런데 독립다큐가 질기게 살아남은 만큼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언급들은 여전함. 이번 두개의 문에 대한 허지웅의 평론도 그런 차원. 잘 모르고 썼으니 그러려니 하는데 문제는 두개의 문에 대한 그의 논리가 고작 잘 모르는 사실과 문화에 대한 무시로부터 출발했다는 것. 아니... 이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상찬하는데 고작 독립다큐 씹어야 생겨나는 것인가? 굉장한 사실을 발견한듯 말이다? 잘 이해가 안가는것은 두개의 문 감독들 스스로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동가에 기반한 창작자라 스스로 말하는데 굳이 거기다 활동/창작자를 분리 시켜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뭔지? 그게 분리가 되기는 하는건지?#


이런 불만이라면 말 자체로는 이해할만하고, 동의한다. 언제나 '어떤 비평가들'은 예술가와 활동가의 자리를 분별정립하며 '활동'과 '창작' 중에서 고르라며 은연중에 양자택일을 강요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분별정립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허지웅 글의 저 맥락에 대한 태준식의 저런 분노도 과도할뿐만 아니라 오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허지웅의 저 논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나 역시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이 어떤 사회적 정의의 문제와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나 극영화에 대해 말하고, 홍보하고, 상찬을 할 때, 그들이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작품이 다루고 있는 소재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도가니>가 인화학교에서의 폭력적 만행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고 할때, 그 영화가 진정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무엇인가? 나는 그 영화의 형식과 내용 모두를 보았을 때, 그 영화가 고작해야 자유주의적 정의감과 공분을 자아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영화가 사회적 정의를 해친 어떤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매우 '정의로운 영화'라고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의 책무가 고작해야 그러한 자유주의적 정의를 밝히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면, 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모든 예술작품에 대해 이야기할때 그 작품이 동시대 세계를 대하는 미학적 태도를 가장 중요한 준거점으로 삼듯,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하지 아닐까? 한국에서 다큐멘터리가 일종의 교양 자료로만 쓰이고 있는 처지를 떠올리더라도 종국에 그것이 지닌 고유의 자리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정치', 혹은 그 사이 어디쯤, 때때로 정치, 종종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만) 태준식이 '활동가에 기반한 창작자'의 자리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그 자리가 명백히 '가능함'을 증명해내려고 노력하는 고군분투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지할만 하다. 딱 이 차원에서 나는 태준식의 지지자이며, 씨니컬한 전문가들에 대한 적대자이다. (예술가는 아마츄어이어서도 안되지만 분과학문 체계의 연구자가 자기 학문의 전문가가 되려 안간힘을 쓰듯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 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준식이 강박증적으로 허지웅 글의 타당한 지점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지웅의 논지가 타당한 첫번째 부분은 그가 기간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 영화를 대하는 '소재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며, 두번째로 타당한 부분은 우리가 영화를 대할때 그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회정의의 차원에서 소급한 문제적 '소재'가 그 영화의 미학적 진전을 설명해줄 순 없으며, 진정성이라는 것 역시 그 영화를 보고난 후 영화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후 드러나는 대상에 대한 태도와 규준이 되는 미학을 사고하며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 그가 대상을 만나고 취재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면서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 따위의 후일담은 영화 밖의 사연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비평가는 영화 그 자체를 보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허지웅이 독립다큐에 대해 대단히 무지한 상태도 저런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자기 깜냥 안에서 할 수 있는 얘기를 했고, 일견 타당한 부분들에 대해 우리가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그 허지웅 글의 맨 마지막 문단의 몇몇 대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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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이 다큐가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용산 참사에 관한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진실이란 결기어린 주관의 기록이 아닌 다양한 입장들의 맥락을 종합하고 이해하는 태도로부터 가장 빨리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이는 다큐 장르 자체의 본령과도 닿아 있다. <두 개의 문>이라는 제목이 향후 동시대 다큐 감독들에게 일종의 기준으로 언급되기를 기대한다.#


일단 나는 '진실'이라는 게 "결기어린 주관의 기록"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든, 그 영화의 형식과 구조가 어떠하든 간에 결국 "결기어린 주관"이야말로 작가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태도가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허지웅이 어떤 작품들을 그러한 "결기어린 주관의 기록"의 사례들로 삼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최근의 어떤 작품들은 '결기'란 눈꼽만큼도 없이 말랑말랑해진 '주관의 기록'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치 운동이 그러한 것처럼 일말의 결기마저 상실한 영화적 비실비실함.) 물론 허지웅이 하고자하는 진의를 최대한 고려해 제고하자면, 그 말은 결기만 있고 종합적 시각은 부재하는 태도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었겠지만, 두 가지 서사 전략에 대해 이렇게 대당시키는 것이야말로 어폐가 있다. 오히려 더 이야기해야할바가 있다면 과연 '결기'가 중요하냐 '종합'이 중요하냐겠지만, 그렇다면 <결기어린 주관의 기록들을 모아 세계의 풍경들을 '종합'>하는 것은 어떠한가? 나는 그쪽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결기어린 주관의 기록을 남기는 카메라의 자세를 비판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오히려 현대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진전에 비하면, 그리고 '대상'을 응시하는 카메라에 대한 복잡다기한 사유에 비해 후퇴된 것에 가깝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관객을 선험적으로 재단하고 있음에서 야기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허지웅이 이 글의 결론으로서 "다큐 장르 자체의 본령"을 언급한 것은 오히려 보다 많은 질문을 남긴다. "다큐 자체의 본령"은 어디인가? 사물에 대해 응시하고 통렬하게 대면하는 것인가, 혹은 카메라가 저 멀리 숨어 '다양한 입장들'을 조망하며 그것들을 종합하고 이해하는 가운데 진실이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되묻는 것인가?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자는 미시적인 관계 속에서 대상을 응시하고 조망하며 그 사물 주위의 진실에 대해 파고드는 치열한 태도를 담보로 하며, 후자는 약간은 후퇴된, 그리고 거리를 둔 자리에서 거시적이고 전체적인 역관계들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저 허지웅 칼럼에서 어폐가 심한 부분은 맨 마지막에 있다. 그는 진영논리를 갖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잊지 맙시다”식의 상찬을 보내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따져보자고 말하면서 <두 개의 문>이 "향후 동시대 다큐 감독들에게 일종의 기준으로 언급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목적론적 진영 논리를 갖고 과도한 상찬을 보내는 것에 가깝다. 

맑스는 <자본>에서 “인간의 눈에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die phantasmagorische Form)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K. Marx)라고 말한다. 발터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에서 바로 이 ‘판타스마고리아’를 이 '불가능한 프로젝트'의 기조로 삼는다. 이때 판타스마고리아는 사회의 문화적 표상물들이 뿜어내는 매혹과 환상의 결합물이다. 그것은 파사주, 온실, 파노라마, 공장, 밀랍 인형 박물관, 카지노, 역, 온천 휴양지 등의 건축물과 후일 오락산업의 맹아가 되는 만국박람회를 지배하는 '마성'(루카치에게는 '물화' 개념?, 맑스에게는 이데올로기? 물화?)이다. 상품의 매력에 빠져 도시를 부유하는 도시인들의 체험의 본질은 판타스마고리아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부르주아 개인들의 실내 공간 역시 안락과 안전의 판타스마고리아 속에서 건설된 것이다. 요컨대 <파사젠베르크>는 20세기의 각성된 눈으로 19세기가 꾼 꿈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 간의 관계와 사회적 관계 사이의 구조적 착시는 우리에게 이데올로기적인 오인을 불러일으킨다. 용산 참사를 경과하고 사람들이 어떤 진실을 응시하기에 혼란함을 느끼고 곤경을 느끼는 것도 그러한 지점에 있다. 하기에 다큐멘터리가 자신의 미학적 노정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오인은 어떻게 균열될 수 있는가?" 과연 <두 개의 문>은 이 질문을 돌파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틀 즈음 후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우선 이것을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두 개의 문>에 대한 이런저런 논평들은 그 영화가 지닌 어떤 발화 형식을 넘어서서 허지웅이 말하는 그 '종합하고 이해하는 태도'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질문은 어떻게 던져져야 하는가? 허지웅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그리고 태준식은? 나는 둘 모두 다큐멘터리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은채 헛다리 짚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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