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이 영화는 몇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첫째로 우주의 역사, 지구의 역사를 기술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는데 그 이미지가 굉장히 스펙타클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압도감이 상당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긴 시퀀스를 두고 "굉장히 지루했다."고 말하고, 실제로 영화관에 있을때 이 장면 도중에 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나는 이 장면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엄청난 기술적 노력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로 이 브레드 피트의 연기. 압도적이다. 이 영화를 그나마 살리는 유일한 존재는 브레드 피트 뿐이다. 숀펜은 밍숭맹숭하고, 브레드 피트만 제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셋째로 촬영이 굉장히 유미주의적인데 어떤 지점에서는 매우 인상깊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영화를 비판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드러내는 용해성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사실 인간의 삶의 영지성을 표상화시킨 것이지만, 어쩌면 그 영지성 그 자체가 우리가 삶을 살면서 느끼는 모순과 갈등들을 여지없이 용해시켜버리기 때문에, 조금도 균열지점으로 착종할 수 없게 만드는지 모른다. 이 영화에 대한 내 비판적 관점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 용해성은 아마도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세계관 그 자체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서양인들이, 그리고 근대 이후의 인간이 던지는 어떤 질문, '죄의식'에 대한 영화이다. 이 질문은 끊임없이 영화의 표피에서 내레이션으로, 배우들의 얼굴로, 이미지로, 교차되며 던져진다.
"Where were you?"
당신은 존재하나요?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아버지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행동하나요?
나는 죄를 지었어요.
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요.
이런 마음을 갖는 저는 용서받을 수 없어요.
아마도 이것은 서구인들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일 것이며,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일종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형성하는 질문일 것이다. 나는 세계적인 모순과 갈등들이 이 질문하나로 치환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이 영화의 용해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종의 내셔널그래픽 자연 다큐멘터리같은 이미지들을 현상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질문과 대면시켜버리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을 기독교적인 죄의식 성장담론과 부당하게 연결시켜버리는 것까지. 초반의 '지구와 생명의 생성'을 담은 자연다큐멘터리적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어떤 표피, 깊은 바다의 물결과 마그마로 가득한 뜨거운 불길, 행성 표면의 폭발과 장엄한 스펙타클의 구현이, 근대의 핵가족 이데올로기 형성 이후에 강화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신경증적 죄의식과 통합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우리가 대면하는 세계에 대한 어떤 근본적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데, 이 영화는 그것을 거대한 자연의 생명서사의 스펙타클과 연결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철저히 영지주의적Gnosticism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반면 영혼은 긍정적으로 보았다. 따라서 개인적인 깨달음을 통한 구원을 추구하면서 극단적인 선악 이원론을 추구했다. 그노시스Gnosis는 그리스어로 '지식'을 뜻하는데, 물질이 아닌, 비가시적인 무엇을 뜻한다. 여기에는 어떤 영적인 속성이 있다. 만약 인간이 지식을 개인적으로 이해하면 인간은 자신의 몸을 초월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영지주의Gnosticism의 구원에 대한 사상의 핵심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고 선한 신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지식 등 영적인 것이 나오고 악한 신에게는 악의 근원이 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나온다고 여겼다. 따라서 인간의 선한 영혼이 죄악으로 물든 육체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기독교도 핵가족 자식교육은 철저히 영지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게 몸은 아주 종종 죄악의 근원인것처럼 취급되어왔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면에서 상당히 이원론적인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화폐와 상품에 대한 물신성이 물질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전치시켜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사회를 신봉해야만 하는 보수적-신교도적 기독교도들에게 화폐의 존재 그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반면 우리는 끊임없이 화폐 물신을 버릴 수 없다. 하기에 인간의 몸이 악으로 표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하나의 핵가족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에 대한 역사로 구성되어 있기에 근대성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정신세계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생명과 죄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초역사적으로, 일종의 자연다큐멘터리적인 영상 시퀀스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질문은 다시 '육체'로 회귀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파국 앞에 직면해 있는 기독교도들(교회나 신앙을 시장에서의 상품으로 간주하는 모리배들을 제외하고.)의 정신세계는 점점 더 영지주의적으로 변이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원론자들이다. 이들이 세계경제의 파국적 균열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런 거시적인 위기의 순간에 직면했을때 기독교들은 점점 더 개인 속으로 침잠하거나 '종교'로서의 자본주의가 지닌 화폐라는 신앙들로 빠져들 것이다. 따라서 영지주의가 아닌 정통성은 조금도 발붙일 곳이 없어지게 되는 것 같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오늘날 불안감에 휩싸인 서구인들에게 어떤 안심을 안겨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것은 생명 탄생의 숭고성의 재현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런 숭고성은 우리에게 아무런 답도, 질문도 안겨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주체적 지위에서 복종적 관계로의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숭고함을 '미'와 부당하게 연결시키려는 시도조차도 결국 이 숭고가 '미'의 미학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드러낼 뿐이다. 이 영화가 유독 영미권과 유럽같은 기독교 문화가 강한 지역의 지식인들과 중산층에게 지지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영화가 대중들이 갖고 있는 신으로의 도피라는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적 죄의식의 근원을 자연주의적으로 표상화시킴으로써 세계의 모순들을 낭만주의적으로 환원시켜버린다. 결국 균열 앞에서 주저 앉아 모든 긴장들을 용해시키는, 상상계로의 도피 속에서 마무리된다. 이런 주체들에게 남겨진 세계는 중독에 걸린 신경증 환자의 망상으로만 가득 찬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오늘날 서구의 균열의 토픽으로 돌아가 이 영화를 '응시'해본다면, 우리는 우리 안의 분열을 목격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균열의 장소들에서 몫 없는 자들은 '정치' 없는 분노와 폭력의 연쇄 속에서 지옥을 체험한다면, 도피를 택한 쁘띠부르주아들의 세계는 하나의 가짜 천국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둘 모두를 지옥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둘 모두 메시아가 이미 이곳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전자는 세계의 분열 속에서의 박탈감과 분노를 파괴적으로 승화시키고 있으며, 후자는 메시아가 엉뚱한 곳에 도착했음을 믿고 싶어한다. 그 믿음은 이 지옥같아진 '타락한' 세계의 그 무엇도 전복시킬 수 없는 도착증적 믿음이다.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


덧글
2011/10/30 0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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