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영화

영화는 도심 속의 한 풍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영어’를 쓰는 두 명의 외국인 남자가 한 젊은 여자를 위협한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다가 도로변의 차 앞에 다다르는데,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어떤 시선’의 싸늘한 외면의 시선이다. 누구일까? 중요한 것은 여기서 이 ‘시선’이 다름 아닌 카메라의 시선이라는 점이다. 관객과 카메라의 시점을 동일시함으로서 관객이 현실의 ‘불의’ 자체를 외면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모든 특성이 드러난다. 영화는 누구를 응시하는가, 그리고 어떤 동일시를 요구하고 있는가? 전자에 대한 답은 당연히 이 사회의 뒤틀리고 비뚤어진 참혹한 풍경들이다. 신자유주의 경쟁질서가 불러온 참혹한 관계들의 광경. 후자에 대한 답은, 아직 확언할 수 없는 의구심 그 자체다! 우선은 이것이 바로 ‘관객’ 자신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해보도록 하자. 왜 관객은, 다시 말해 ‘대중’은 모든 걸 목격하면서도 모른 척하는 자리로 호명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지닌 모든 색깔들이 뿜어져 나온다. 모든 갈등들의 근원에 <김봉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현대인을 향해 품고 있는 계몽의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몇 가지 의문들이 생긴다. 왜 ‘계몽’인가? 그리고 무엇을, 계몽하려 하는가. 주인공인 혜원은 회사에서의 겪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잠시 쉬면서 머리를 식히고 오라는, 그러나 실제로는 도덕적 결함으로 빚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징계’ 처분을 받는다. 이것은 그녀가 소꿉친구인 복남이 살고 있는 섬으로 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복남은 사실 이전부터 혜원에게 지속적으로 편지와 전화통화를 통해 연락을 취하며 모종의 구호 요청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 답장이 없음에도 계속해서 전달되는 이 편지의 정체는 무엇일까? 과거에 억눌린 자의식이 죄값을 치루라는 정언명령처럼 다가온다. 성인이 된 이후에 반복된 증상적 행위로서의 ‘냉소주의’가 온전히 죄의식으로 남아 반복되는 것이다.

헌데 고향에 내려간 혜원은 왜 영화 초반부인 회사에서부터 ‘징계’를 받게 되는걸까? 심지어 섬에 머무르고 있을 때 문자메시지를 통해 ‘정리해고’ 통보까지 받는 혜원. 어찌됐건 간에 이런 그녀에게 왜 이런 ‘좋은’ 변명거리가 생기게 되는 걸까. 영화가 마지막에 피칠갑의 잔혹 살인극으로 끝나고 나서도 그녀만은 죽지 않는데, 왜 그녀에게 두 번째 기회가 허락되는 걸까.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된 적 없었던 기회가 말이다. 환기하자면, 나는 이 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리적 정언명령’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된 혜원의 ‘정상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윤리의식이 훌륭한 핑계거리들을 갖추고서 엉뚱한 곳에서 무마되기 때문이다. 

가정해보자. 관객인 우리는 현대인, 그리고 도시인으로서 그녀의 상황에 대해 일정한 이입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초반부터 그 점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 우리의 죄는 아주 명약관화한데, 현대인인 우리는 매우 이기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혼란과 범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모른 척하기를 즐긴다. 결국 이 (사회적) ‘원죄’는 도시에서가 아니라 근원 지점으로 돌아가서야 진정으로 까발려질 수 있는데, 우리들의 고향인 섬, 그러니까 우리들의 진정한 원죄가 묻힌 섬에서 처벌받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전체는 일종의 거대한 판타지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혜원이 자본주의 경쟁사회인 도시에서 살아남게 되면서 배제에 대한 공포와 포섭에 대한 환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윤리를 체화했다가, 하나의 거대한 교훈을 얻게 되는 설정. 그럼으로 인해서 그녀가 다시 ‘서울’이라는 도시, 현실에 돌아왔을 땐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는 ‘용기’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윤리를 재소환하는 계몽극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근대적인 윤리의식일까? 오히려 그런 합리적 체계에 근거한 윤리들이 우리들을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섬이라는 공동체의 규범들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윤리 규범 역시 괴이한 측면이 있다.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과도하게 설정해놓은 장치들에 의해 이 섬은 항상-이미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판타지적 장치들 자체가 이 영화의 독특성들을 이루지만 결국 이것이 ‘계몽’을 위한 기획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나는 이 계몽이 과연 현대인이 체화한 지배이데올로기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처음부터 우리가 그런 이성적 곤궁으로 인해 이런 위기에 처한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회(운동)적 기획을 ‘계몽들’로 채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는 골고다 언덕에서 외친 말이다. 예수는 이처럼 자신을 죽인 그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탄원했다. 근대적 계몽 기획이 탄생한 태초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배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미디어와 권력에 순응하고 있는걸까? 오히려 우리는 모두가 “나도 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실제로 오늘날의 가장 무시무시한 권력의 대리주체인 ‘네티즌’은 하나같이 모든 매커니즘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며, 도덕의 심판자 역할을 하기를 자임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 개인적인 차원의 다양한 모순들과 불만지점들이 보편적인 차원에서 고려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주체가 그/녀의 “제정신”과 그/녀의 “정상적” 기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제도화된 실천들/신념들의 탈중심화된 상징적 질서를 체계화할 것인가? 요컨대 혜원이 결국 도시로 돌아와 자신의 ‘방’과 ‘샤워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고 사회적으로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규범들을 다시금 체화하는 방식으로 돌아온다고 한들, 그녀는 영원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만드는 국가적 공리체계로부터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어떤 사람들이 사회드라마적 요소가 강한 영화들이 갖고 있는 현실비판적인 목소리가 주는 의미에 대해 애써 폄훼하며 그것이 ‘세련되지 못한 방식’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도 어떤 서사 형식이 세련된 방식인지는 첨예한 쟁점 위에 놓여있으며, 도리어 서사미학의 고귀한 면모들이 체제 안에 더 쉽게 포섭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동시대적 가치에 호소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머리를 꽝하고 때릴 정도로 강력한가이다. 물론 잔혹한 장면이 나오는 것과 ‘사람들의 머리를 꽝 때리는 정도의 울림’의 여부는 전혀 관계없으며,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어쨌든 이 영화의 아쉬운 점은 바로 거기에 있는데, 교훈적 직시, 훈계, 관객에 대한 총체적 심판이 이루어지고나서 다시금 후퇴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관객들을 계몽의 장으로 이끌어 저항 이데올로기의 주체로 나서게 할 수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직시하게라도 하는지 의심스럽다.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서영희,지성원,박정학 / 장철수
나의 점수 : ★★★

신자유주의적 주체에게 이토록 가혹한 방식으로 '윤리-정치'를 훈육시키는건 파시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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