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턴의 비극 이론의 파산에 대한 메모 이야기

<우리시대의 비극론>에서 발췌

- 다른 모든 예술이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비극 작품 속에는 그것을 넘어선 지점을 가리키는 부분이 존재한다. 예술은 예쑬과 생활의 해체이다.

-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현대에 들어서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중요한 비극 작품이 지속적으로 산출되어 왔는데도" 일부 비극 이론은 여전히 현대 비극의 가능성을 완강하게 부정한다고 꼬집는다. 반면 롤랜드 골은 철학적 비극 이론이 성행했던 19세기─이 시기는 헤겔, 셸링, 쉴레겔, 쇼펜하우어, 니체의 전성기였다─는 비극 형식이 잠시 고갈된 듯이 보였던 시기였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창조할 수 있는 자는 창조하고, 그럴 수 없는 자는 철학을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란 다른 방식으로 창조된 비극이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략) 즉 비극은 피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고 철학은 운명론을 의미한다("그녀는 남편을 스트립 댄서에게 빼앗긴 현실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철학적이었다"). 예술에서 모더니즘이 아방가르드 문화 이론으로 이행하듯이, 비극은 헤겔부터 니체까지를 통과하는 동안 이론적 성찰로 바뀐다. 비극은 시련과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기표, 신정설(神正說, theodicy), 장중한 이데아, 궁극적 가치의 비옥한 원천, 혹은 반계몽주의의 한 형식, 철학적 이중성에 대한 예쑬적 해결 등과 같은 것이 되었다. 혁명의 시대─많은 몽상적 젊은이들은 자기 시대만이 혁명적이라 생각한다─에는 시련이나 고통 따위의 사람의 힘을 빼는 현실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비극을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결국 비극은 개념이 되어 디오니소스적인 것, 절대성, 희생의 필연성, 자연과 문화의 갈등, 정신의 외화 등등에 대한 성찰 속을 자유롭게 날게 된다. 이러한 성찰 속에서 비극은 생기론(vitalism)이 되거나 아니면 인간의 불행과는 무관한 인간주의가 된다.

- 발터 벤야민에게 소크라테스의 차분하고 수수한 죽음은 비극의 죽음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숭고하지 않은 방식으로 독특하게 이루어진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비극적 죽음의 패러디였다. 니체는 합리주의(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 심리적 사실주의, 자연주의, 일상생활, 변증법, 역사적 낙관론, 윤리학과 이성적 탐구 등이 야합해서 신화와 비극을 죽였다고 본다. 비극의 죽음은 경멸할 만한 (그리스의) 계몽주의가 처음으로 거둔 위대한 승리였는데, 니체의 과업은 이 죽음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 '비극적 지식'은 세상의 무의미성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비극적 지식'은 지식의 한계를 감지하기도 하는데, 칸트와 쇼펜하우어는 철학을 통해 지식의 한계를 논한 바 있다. 그런데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이와 같은 회의론은 비극문화를 부활시켜서 신화가 다시 융성하고 지혜가 과학을 추방해 버리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비극과 철학은 당연히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비극은 인식처럼 저급한 능력으로는 도저히 꿰뚫기 힘든, 인간사의 환원불가능한 신비나 애매성을 의미하기 떄문이다. 이런 뜻에서 비극은 반계몽적이다.

- 많은 비극 이론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 즉 미덕과 합리성과 사회적 조화를 일종의 진통제처럼 사용해서 비극적 주제가 가진 파괴력을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인식한 점에서 겔리치는 옳다. 비극 작품이 디오니소스 노릇을 한다면, 유순한 교훈주의를 내세우는 비극 이론은 아폴론 역할을 한다. (중략) 이렇게 해서 겔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과학과 역사 사이에 해당하는 어느 지점에 비극 예술을 위치시킨다. 비극 예술에는 과학과 같은 수학적 엄밀성은 없으나 필연성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여러 세기가 흐른 뒤 알튀세는 이와 매우 흡사하게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예술을 배치하게 된다.

- 레이스가 보기에 비극은 기존의 지식 체계의 한계를 보이고 그 체계의 핵심이 무의미함을 폭로하여 새로운 담론 체계를 건설한다. (중략) 이처럼 비극 형식은 전복적이지만, 즉 피에르 마셔레가 문학이 이데올로기에 대해 행한다고 보는 역할을 비극은 담론에 대해서 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 전복성은 오래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극성의 기능은 이렇게 해서 포착된 불가해한 침묵을 다시금 통제된 지식으로 환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극은 "무의미를 극복하는 예술"이 된다. 

- 현대의 비극은 하나의 신정설, 형이상학적 인간주의, 계몽주의 비판, 또 다른 형태의 종교, 일종의 정치적 향수 등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주목하듯이 비극은 종종 "시대의 근본적 신념과 긴장을 구현한다. 비극 이론은 떄로 특정한 문화의 모습을 대단히 심오하게 형상화하는 것이다." 윌리엄즈의 예리한 지적처럼, 비극 예술 자체를 만들어낸 문화도 중요하지만 비극 이론을 만들어낸 문화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전통주의적 비극 개념은 숙명과 우연, 자유 의지와 운명, 내면적 결함과 외부 상황, 고상함과 천박함, 맹목과 통찰, 역사성과 보편성, 가변성과 불가피성,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과 그저 불쌍할 뿐인 것, 영웅적 도전과 치욕적인 무기력 드오가 같은 일련의 구분들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이제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 보수적 비평가들은 비극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고, 일부 급진파들은 비극이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진영 모두 비극이 이런 이분법적 구분들에 의존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보수파들이 비그그이 몰락을 아쉬워하는 데 반해 급진파들은 기뻐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좌파우 우파는 비극을 완전히 동일하게 이해한다. 좌파는 비극을 거부하고 우파는 지지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의 유일한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좌파는 비극 개념을 시대착오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라 섣불리 폐기해서는 안된다. (중략) 우리 시대의 급진적 관심들과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비극 개념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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